아내가 아픈 나를 두고 애들과 집을 나가 화가 났다." 지난 7월 인천 남동구 주택가에서 이혼소송 중이던 아내(40)를 무참히 살해한 A(47)씨가 경찰 조사에서 한 말이다. 오후에 동네 복판에서 벌어진 일이라 주민 10여명이 목격했고 그중 둘은 두 사람의 딸이었다.
이 참극 뒤에는 수년간 진저리나게 지속된 가정폭력이 있었다. 범행 당일, 남편은 별거 중인 아내가 사는 집을 향해 수업을 마치고 귀가하는 딸들을 뒤따라가 흉기를 휘둘렀다.
지난달 서울 강서구 한 아파트단지 주차장에서도 비슷한 사건이 났다. 강서구 사건 범인의 세 딸이 청와대 게시판에 "아빠를 사형시켜달라"고 청원했듯이, 인천 사건 범인의 딸인 중2 소녀도 "아빠였던 사람이지만 심신미약이란 이유로 처벌이 줄어들지 않길 바란다"고 탄원했다.남편이 아내를 죽이는 '페미사이드(
Femicide
·여성 살해)'가 작년 한 해 전국에서 55건 발생한 사실이 확인됐다. 일주일에 한 건꼴로 어디선가 누군가가 '남편' 손에 죽었다는 뜻이다. 같은 기간 애인 간에 벌어진 사건(26건)까지 합치면 피해자는 더 늘어난다. 전 남편, 전 동거남, 전 애인이 저지르는 살인은 규모를 알 수 없다.
국내 페미사이드 규모가 시민 단체 추정치나 언론 보도, 전문가 발언이 아닌 '국가 기록'을 통해 공식 확인된 건 이번이 처음이다. 가정폭력이 벌써 여러 번 사회 문제가 됐지만, 검경은 이런 사건에 대해 집계 자체를 한 일이 없다.
이번에 나온 수치는 지난 10월 강서구 살인 사건이 난 뒤 "경찰이 기본적인 파악도 못 하고 있다"는 비판 여론이 빗발치자, 경찰이 지방청별로 수사 기록을 뒤져 국회 정춘숙 의원실에 보고한 건수다. 정 의원은 "제대로 된 대책은커녕, 실태조차 정확히 파악한 적 없는 게 우리 현실"이라고 했다.
◇
WHO
"세계적인 유행병"
이 중엔 돈이나 질투심 때문에 벌어지는 사건도 있다. 하지만 더 많은 건 수십 년 이어진 가정폭력이 살인으로 종지부를 찍은 경우다. 선진국 정부와 국제기구가 이 문제를 중대한 사회 이슈로 다루는 것도 그 때문이다.
유엔 마약·범죄 사무소(
UNODC
)는 작년 한 해 전 세계적으로 여성 8만7000명이 살해당했고, 그중에서 3만명(34%)이 남편이나 애인, 혹은 헤어진 남자에게 살해당했다고 집계했다. 세계보건기구(
WHO
)는 "친밀한 파트너의 폭력에 시달리는 여성은 유산할 확률과 우울증에 걸릴 확률이 그렇지 않은 여성의 2배 수준"이라며 "여성에 대한 폭력은 특정 사회에 국한된 문제가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유행병처럼 번져나가는 추세"라고 진단했다. 남녀 차별 철폐, 관련 법 개정 등을 통해서 적극 대처해나가야 한다고 국제사회가 입을 모으고 있는 것이다.
☞페미사이드(
Femicide
)
부부관계·애인관계 등에서 벌어지는 폭력이 극단으로 치달아, 여성이 상대 남성에게 살해당하는 것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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